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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이성계의 결단이 만든 새 시대의 시작

by skylight-story001 2025. 7. 3.

태조어진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이성계의 결단이 만든 새 시대의 시작

고려 말, 외세와 권문세족의 부패로 인해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던 그 시기, 한 인물이 역사의 큰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었습니다. 바로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입니다. 그는 뛰어난 무장이었으며 북방에서 왜구를 격퇴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후 그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새로운 왕조, 조선을 창건하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1388년, 위화도에서 벌어진 위화도 회군이 있었습니다.

14세기 후반 고려의 혼란과 왜구의 위협

14세기 후반, 고려는 내부적으로 권문세족의 탐욕으로 토지제도가 붕괴하고 권력이 매우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이로 인해 농민과 서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중앙 정부조차 힘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왜구의 잦은 침입은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국가안보를 위협했습니다. 이때, 이성계는 군사적 통솔력과 탁월한 전략으로 왜구를 효과적으로 격퇴하며 백성과 군사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났고, 그는 고려의 필수적인 무장이자 ‘국가의 구원자’로 떠올랐습니다.

요동 정벌: 무리한 결정과 정치적 긴장의 고조

1388년, 고려 조정의 실권자였던 최영은 명나라와의 외교적 갈등을 이유로 요동 정벌을 계획합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논리로 전면전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이는 실제로는 명나라와의 충돌이라는 위험을 동반한 무리한 결정이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전권을 맡아 병력을 이끌었지만, 출병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차원과 권력의 논리에 휘둘려 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위화도에서 군을 돌리다: 네 가지 사불가론

위화도(현 단둥 인근)에 도착한 이성계는 군사와 정치적 환경을 면밀히 고찰한 후, 다음과 같은 ‘사불가론(四不可論)’을 근거로 회군을 결정합니다.

  • 장마철로 인한 군량 보급 불안정: 긴 장마로 보급선 유지가 어렵고, 대규모 군대 유지에 치명적입니다.
  • 명분이 약한 전쟁: 명나라와의 전쟁이 정당화되지 않아 외교적으로도 큰 부담입니다.
  • 군사들의 피로와 질병: 오랜 행군과 더불어 병·쓰러짐이 만연한 상황이었습니다.
  • 왜구 침입 대비 소홀: 남쪽의 왜구 위협을 방치한 채 북진만 한다면 안보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고려 끝에 그는 명령을 거부하고, 병력을 이끌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고려 조정 권위를 정면으로 도전한 정치적 반란 행위였습니다.

개경 회군과 권력 장악: 정권 교체의 서막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신속히 군사력을 활용하여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는 최영을 체포하고 폐위시켰으며, 고려 왕실과 연결된 개혁파 인사들이 아닌,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와 연합합니다.
이들 급진파는 고려의 전통적 권문세족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 결과, 이성계는 사실상 고려 왕조의 권력 구조를 전복시키고, 신생 왕조 조선 건국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방원과 정몽주의 최후: 고려 충신 제거

조선을 세우려는 이성계에게 정통성 확보는 필수였습니다. 그는 온건파였던 정몽주의 협력을 원했지만, 정몽주는 끝까지 고려 왕조에 충성을 맹세했고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리하여 이방원, 즉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 정치적 갈등에 개입하게 되었으며, 결국 1389년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조선 건국 세력이 고려 왕가에 대한 마지막 저항 세력을 제거한 중대한 전환점이 됩니다.

1392년 조선 건국: 국호와 정체성의 선택

마침내 1392년 이성계는 마지막 고려 왕인 공양왕을 폐위하고 새 왕조를 선포합니다. 국호는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조선’으로 정했고, 이로써 유교 중심의 새로운 정치문화와 제도가 탄생하게 됩니다.
조선 건국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으며, 유교적 이념에 기반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와 개혁 지향적 행정이 시작된 근본적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습니다.

정도전의 개혁 기틀: 체제 완성과 유교국가 성립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은 신생 국가의 철학적 토대와 제도적 구조를 수립하는 데 중핵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통치 철학: 공맹(孔孟)의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상을 정착시켰습니다.
  • 중앙집권 체제: 삼사(三司) 설치와 관직체제 개편을 통해 왕권 강화와 권력 집중을 추진했습니다.
  • 토지제도 개편: 전답제를 도입하고, 균전법·조세제도를 정비함으로써 백성 중심의 경제 체제로 전환하려 했습니다.
  • 교육제도 정비: 성균관과 향교를 정비하여 유생 양성과 인재 선발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이로써 조선 초기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체제가 유교 중심의 통합적 국가 모델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족의 구체제를 해체하고 모두가 법과 제도 아래 평등하게 기여하는 국가 운영 방향을 지향했습니다.